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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을 넘어 깊은 의미를 품는다. 표현주의는 화가의 내면, 공포, 슬픔, 불안을 캔버스에 진솔하게 담아낸다. 이번 글에서는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에드바르 뭉크와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의 삶과 작품을 통해 그들의 예술이 어떻게 인간의 감정을 표현했는지 탐구한다. 

 


표현주의란?

표현주의는 인상주의와 구별된다. 인상주의가 눈에 보이는 장면을 포착한다면, 표현주의는 내면의 감정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뭉크와 키르히너는 이 흐름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뭉크의 절규는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얼굴을 아는 이는 드물다. 키르히너는 국내에서 덜 알려졌으나, 독일 표현주의의 핵심 화가다. 이들은 색채와 형태를 왜곡해 불안과 고통을 생생히 그려냈다.


에드바르 뭉크: 절규 속 비극의 삶

뭉크(1863~1944)는 노르웨이 태생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비극으로 점철됐다. 다섯 살에 어머니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누나도 같은 병으로 잃었다. 아버지는 종교에 집착하며 가족을 돌보지 않았다. 뭉크는 “공포와 슬픔의 천사는 태어날 때부터 내 곁에 있었다”고 기록했다. 선천적 약체질, 우울증, 대인기피증에 시달렸지만, 그림은 그의 구원이었다.

초기작은 사실주의적이었으나, 누나의 죽음을 그린 아픈 아이는 강렬한 감정으로 초기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절규는 20대 후반에 탄생했다. 뭉크는 이 작품을 그리며 “자연의 비명을 들었다”고 전했다. 핏빛 하늘 아래 불안에 떨며 귀를 막은 순간은 미라 전시의 충격과도 연결된다. 그의 작품은 죽음, 사랑, 이별을 주제로 이어졌다. 불륜과 약혼자의 총격 사건은 그의 정신을 흔들었지만,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서 희망을 발견하며 변화했다. 말년에는 태양과 같은 밝은 작품을 남겼고, 작품을 오슬로 시에 기증해 나치의 탄압에서 보호했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도시와 전쟁의 그림자

키르히너(1880~1938)는 독일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건축을 공부했으나 예술에 매료돼 화가가 됐다. 그는 ‘다리파’ 모임을 만들어 전통 미술을 거부하고 감정을 분출하는 예술을 추구했다. 왜곡된 형태와 강렬한 색채로 도시 생활의 고립을 그렸다. 베를린 거리는 산업화된 도시의 단절감을 보여준다.

1차 세계대전은 키르히너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군 복무 중 신경쇠약으로 퇴출된 그는 군인 목욕과 자화상에서 전쟁의 공포를 표현했다. 스위스 다보스로 이주해 자연 속에서 회복을 꿈꿨으나, 나치의 퇴폐미술 전시로 작품이 불태워지자 절망했다. 1938년, 그는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예술은 진실된 내면의 감정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작품에 고스란히 담겼다.


두 화가의 공통점과 차이

뭉크와 키르히너는 개인적·사회적 고통을 예술로 승화했다. 뭉크는 가족의 죽음과 사랑의 상처를, 키르히너는 전쟁과 도시의 소외를 그렸다. 둘 다 나치의 탄압을 겪었으나, 뭉크는 작품을 기증으로 지켰고, 키르히너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그들의 작품은 현대인의 불안과 공감하며 표현주의의 가치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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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예술로 전하는 내면의 외침

뭉크와 키르히너는 고통을 예술로 바꾼 화가다. 그들의 캔버스는 인간 내면의 외침을 담는다. 절규와 베를린 거리는 시대를 초월해 우리에게 말을 건다. 표현주의는 삶의 아픔을 마주하고 진솔하게 표현하는 용기를 가르친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내면의 목소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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